아버지가 재활병원에서 재활을 꾸준히 받고 있던 어느날이었다.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하다가 열감이 생겼다. 이 때가 코로나 시절이었기 때문에 코로나 검사 키트를 이용해서 검사를 진행했다. 양성이 나와 타 병원에 입원하여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왜 이 병원에서는 안되냐고 물었더니 재활병원이라 코로나가 전염되기 때문에 안된다고 하더라. 격리 병동조차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대학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받았다. 응급실로 이동 중에 구급대원이 '원래 다니시던 병원이에요?'라고 물었는데,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요새는 코로나 환자가 너무 많아서 대학병원에서 잘 안받아 주는데, 다니시는 병원이면 받아 줄거에요'라고 설명을 해줬다. 병원도 학연*지연*혈연처럼 연고가 있어야 다니기 편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재활병원으로 옮기고 난 후 아버지의 재활치료 시간이 대폭 늘어났다. 대학병원에 있을 때는 하루에 한시간 정도 했다. 30분씩 2타임이었거든. 하지만 여기 와서는 하루에 3~4시간으로 늘어난 것이 아주 좋았다. 아버지도 활동량이 많아지니 표정이 밝아졌다. 나 역시도 기분이 좋았다. 운동은 어떤 것을 했느냐면 침대에 다리를 고정시키고 서는 운동은 고정적으로 30분 하게 됐다. 그리고 워커라고 불리는 보행기를 팔로 지탱하여 아버지가 밀고 다니면서 걷는 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사이클 타는 것도 있었는데, 아버지에게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상반신은 멀쩡하니 허리를 곧추 세우고, 버티고 있으면 내가 사이클 발에 아버지 발을 끼워서 아버지가 스스로 다리를 움직이는 운동이었다. 뭐든 처음에는 쉬운 것이 하나도..
대학병원에 입원한지 6개월이 다 됐을 무렵, 병원에서 퇴원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병원 측 말로는 이렇게 지낸 것도 오래 버틴 것이라고 했다. 걱정이 앞섰다. 아버지는 이 상태로 퇴원을 하게 되면 집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말이다. 간병인 말을 들어보니 아버지는 재활병원으로 전원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재활병원에 전화를 돌리면서 전원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집에서 가까우며 시설이 괜찮고 명망좋은 병원을 고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리뷰를 봤을 때, 사람들이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의심병이 돋아서 쉽사리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선택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제일 괜찮아 보이는 재활병원을 선택했고, 거기서 사람을 보내줄테니 상담해보라..
병실에서 아버지를 돌보며 간병생활을 하던 나는 1개월 쯤 되었을 무렵 많이 지쳐있었다. 병원 생활은 녹록치 않았고, 간병인이 왜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회사에서 배려를 해줘서 1개월은 무급휴가식으로 간병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나는 고민에 빠졌다. 간병인을 구해야 할지 어떨지 말이다. 간병인을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간병인 센터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디 병원에 몇 호실에 누구인데 간병인을 써야 할 것 같다. 라고 말하면 몇 날 몇일에 간병인을 보내줄테니 잘 만나 보라고 이야기 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면 다행이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있었는데, 간병인을 부르는데 사용되는 비용이었다. 간병비는 병원 생활을 할 때, 지대한 영향을 차지한다. 누군가 이 글을 읽게..
욕창 치료를 통해 우연인지 행운인지 아버지의 오른쪽 종아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아버지의 척수경색 등급은 ASIA-A 등급이라고 해서 변화의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반신반의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좋은 결과가 생겨나니 기분이 좋아 아버지를 부여잡고 덩실 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재활치료도 이에 맞춰서 변경이 됐는데, 아버지의 오른쪽 종아리의 움직임을 늘리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정확히 말하면 무릎을 움직이는 운동이 늘었다고 해야 했다. 무릎을 접었다 폈다 하는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이 사소한 행동이 아버지에게는 재활이라는 명목에 운동으로 다가왔다. 무릎의 움직임을 체크했을 때, 1 ~ 10점까지 점수를 매길 수 있다면 아버지는 3점 정도 수준에 경미한 수준으로 무릎의 감..
어느덧 아버지의 병원 생활이 2개월 ~ 3개월이 됐을 무렵 아버지에게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아버지의 오른쪽 종아리 쪽이 검붉게 변해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이 단순히 어디 부딪혀 생긴 멍인가 싶었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이건 욕창이라고 했다. 욕창이 무엇일까? 욕창이란 신경 마비 환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질병인데, 살이 압력을 지속적으로 받게 되면 그 주변 피부가 괴사하면서 살이 파여들어가는 아주 무서운 병이었다. 일반인들도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으면 소위 말하는 배긴다라는 표현을 이 때 쓰는데, 이 느낌을 받으면 자세를 바꿔주던지 일어서던지 하면 해결이 된다. 하지만 마비 환자들은 감각이 없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자세로 유지를 하게 되다보니 살은 비명을 지르는데, 그걸 느낄 수 ..
병원 생활은 재활치료 시간을 제외하면 병상에 누워있는것이 전부였다. 매 끼니 나오면 식사하고 화장실 갔다오고 그게 전부인 따분하고 따분한 생활이었다. 재활시간은 오전과 오후 2차례 진행되었다. 병실은 8층이고 재활치료실은 13층이어서 엘리베이터를 힘겹게 잡아타고 올라가서 받았다. 침대같은 기구에 누워서 자세를 잡으면 침대가 일어서서 사람이 마치 서있는 자세로 자리 잡아주는 것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이걸 하면서 하반신에 전기 패치를 붙여서 전기자극을 주기적으로 주는 재활치료를 했다. 전기자극은 지속적으로 충격을 가했는데, 자극을 받으면 그 부위가 일시적으로 움찔 움찔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신경이 되살아난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모습이었는데, 자극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지는 근육..
병실 생활에서는 사소한 것이 싸움의 원인이 되기 일수였다. 가령 에어컨 바람을 꺼버렸다는 이유로 말다툼이 생기기도 하고, 갑자기 물건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남을 의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에어컨은 내가 꺼버리자 나와 싸우는 사람도 있었고, 싸우지 않고 선풍기를 틀어 더위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도둑으로 몰린 적이 있었다. 어느날 병실에서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병원 생활에 지쳐 노곤노곤하게 잠을 자던 그 순간!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올리며 누가 나를 흔들어 깨웠는지 살펴봤다. 처음 보는 간병인이었다. 나는 왜 깨웠냐고 물었다. '여기 이 성인용 기저귀가 자기 거랑 똑같은데 훔친거냐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속으로 피곤한데다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할..
대학병원에서 척수경색으로 진단을 받고 나서 과거 병력에 대해 조사가 이루어졌다. 아버지는 근 10년 전에 뇌졸증 초기 증상으로 인해 응급실에 내원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말이 어눌해서 깜짝 놀랐던 경험이 있다. 분명히 아버지는 말을 조리있게 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듣기에는 꼬부랑 꼬부랑 말이었다.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그냥 놔두면 분명 큰일이 날 것 같아 얼른 응급실로 달려갔었다. 다행히 골든타임을 지켰기 때문에 뇌졸증 약이랑 고혈압약을 처방받아 복용하면서 호전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점점 좋아지는 모습을 보고 안도하고 있었는데, 몸 속에서는 재발의 신호탄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걸 알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싶다. 의사도 혈액 검사 수치등을 확인해서 뇌졸증 약을 더이상 복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어느 때와 다름없이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던 나는 전화 한통을 받게 된다."아버지가 일어나지 못하고 계신다. 빨리 와서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 나는 사정을 상사에게 말하고 조퇴한 후 총알 택시를 타고 집을 향해 달렸다.급한 일이 있을 때 택시 안은 항상 야속하기 그지없다. 너무 느리고 길은 턱턱 막히고 말이다.그렇지만 초조한 마음에도 교통법규를 어길 수 없으니 참고 또 참았다. 집에 다다랐을 때,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졌다.우연이겠지... 아닐거야... 다시 일어설 수 있을텐데, 장난일거야... 집 문을 열고 아버지의 상태를 보았다. 침대에 누워서 힘없는 눈으로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미안하다"는 말 뿐이며, 옆에서 어머니는 빨리 병원에 가야한다고 당황한 나머지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계셨다.119를 불..